필사내용
시는 고형물이 아니라 액상이지. 지구에 물이 스며들어 있지 않다면 땅이 단단하게 굳어 있을 수도, 식물을 키워낼 수도, 노루를 뛰어다니게도 할 수없어. 네가 시를 좋아한다면 네 몸 안에 백석이, 윤동주가, 소월이 흐르고 있는 것이지. 네 몸의 뼈와 살도 결국은 선조의 물방울 하나가 빚어낸 작품이잖아.
-림태주, [그리움의 문장들]
오늘의 생각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다. 어떤 분야든지 궁금하면 찾게 되고, 찾다 보면 배우게 된다. 앎의 폭을 늘려가다 보면 새로운 것들이 보인다.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풍경이 달라지면 내가 알던 세계가 확장된다. 야트막한 동산에 올라가 전경을 바라보면 우리 동네 정도가 보이지만, 북한산 정상에 올라보면 서울시 전체가 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내가 아는 시의 세계는 우리 동네만도 못하고 내가 사는 아파트 단지 정도도 안될 것이다. 시라는 것에 있어 나는 심봉사나 마찬가지이다. 아는 것도 없고, 볼 수도 없다. 시는 내게 깜깜한 어둠과 같은 것이다.

시를 모른다고 해서 사는데 큰 지장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시를 읽고 시를 좀 안다고 폼을 낼 수 있는 경지는 고된 인생살이에 대단한 사치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쉽사리 도전하기도 꺼려진다.
"사는 것도 바빠죽겠는데 시를 읊어? 이거 한량이 따로 없구먼."
경쟁적인 사회구조 속에서 '시를 읽지 않을 변명' 하나 찾기는 해변가 조개껍데기 찾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이다. 다만 실미도의 명대사처럼 이는 "비겁한 변명입니다."
시를 읽어야 할 당위성은 없다. 당장 사는데 필요한 것들을 알기에도 시간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를 읽어야 한다면 개인의 취향의 문제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나는 시를 읽으면 전율을 느껴~", "시는 위대한 예술이야."라는 사람들에게 시를 읽어야 하는 당위는 필요하지 않다.
하지만 나는 다이어트라는 불멸의 건강법칙에도 당위를 찾는 사람이다. 내가 살을 빼야 하는 이유가 납득되지 않으면 동기부여가 1도 안 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시를 읽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시가 내 삶에 유용한 부분을 제공한다는 것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불행히도 시를 모르기 때문에 당연히 시의 유용성을 알지 못한다. 따라서 행위의 필요성을 따져 묻는 나에게 시를 읽을 가능성은 제로에 수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언젠가는 시를 읽게 될 것이라고 어렴풋이 짐작하는 부분은 있다.
고3 때 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라는 책을 수능 공부 삼아 읽은 적이 있다.(그 시간에 EBS 언어영역 모의고사를 하나 더 풀었다면 좋았을 텐데 이상한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 수능 공부를 위함이었지만 나는 그 책에 흠뻑 빠져 들었고, 공부는 뒷전이 된 채 만화책처럼 재밌게 읽었다.

'시인을 찾아서'는 수능 문제에 나올 만큼 유명한 시인들의 시들을 시인들의 전기와 더불어 소개하는 책이다. 김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읽으면 경주 불국사에 가보고 싶은 욕구가 셈 솟는 것처럼, '시인을 찾아서'를 읽으면 당장 유명한 시들을 탐독하고 싶어 진다. 물론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읽고 경주행 기차표를 끊는 사람이 적듯이 나도 '시인을 찾아서'를 읽고 막 시들을 읽고 그러진 않았다. 다만 '시인을 찾아서'에 소개된 시를 읽고 온몸에 감동이 일어나 그날밤을 그 감동으로 꼬박 지새운 기억이 있을 따름이다.

내가 좋았다고 다른 사람이 좋아할 리 만무하지만, 이렇게 좋은 시였다고 유세를 떨어놓고 소개를 하지 않는 것도 무례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소개하고자 하는 시는 천상병시인의 '귀천'이다.

고3 수험생활이 힘들어서 그랬을까? 그때는 그냥 하늘로 돌아갈 때 '소풍 잘 다녀왔어'라고 말할 수 있는 정도의 작고 겸손한 행복을 바랐다. 그래서 시가 아름다웠고 내 가슴을 울렸나 보다.
앞으로도 시를 읽게 될지 모르겠다. 그래도 읽게 된다면 고3 때처럼 힘들 때가 아닌 즐겁고 행복할 때도 읽을 수 있으면 좋겠다. 위대하고 유명한 시들이 대게 어둡고 자조적인 내용의 시들이 많지만, 자연을 찬미하고 삶의 행복을 노래하는 시들도 많지 않은가?
고3 때 '시인을 찾아서'를 통해 읽은 천상병의 '귀천'도 행복하게 읽을 수 있는 그런 시였다.
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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