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내용
목욕할 때에 생기는 비누거품과 땀과 때, 그리고 기름기가 있는 물을 보면, 너는 역겨워 하지만, 인생의 모든 부분과 인생에서 만나는 모든 것들이 그런 것들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p.158
오늘의 생각
살아오면서 나에게 가장 큰 실패는 무엇인가?
내가 몸서리치며 후회한 사건은 무엇인가?

최근 3년간 인생의 찬미로 가득한 자기 계발서를 많이 읽어서 그런지, 실패하고 후회한 경험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운이 너무 좋아서 모든 것들이 다 잘 풀렸어. 살아오며 나빴던 기억은 없었어. 나는 내 인생에 감사해.”

내 인생을 요약하면 이 세 문장으로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내가 살아온 날들의 전부일까?
나는 정말 후회 없는 인생을 살았을까?
고등학교 때 낯선 지역으로 진학한 나는 일종의 텃세를 경험했다. 지명을 잘 모르는 촌동네에서 수도권 주민이라면 익히 알만한 동네로 진학했다. 그래서 텃세라는 것이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진 못했다. 사람들이 이름만 대면 알만한 큰 도시에 텃세가 있다는 건 좀 이상했다.
하지만 고등학교 어린 시절이라 그랬는지 그런 게 있었다. 그 동네 중학교 출신들이 삼삼오오 패거리를 만들어 다른 곳에서 온 아이들을 배척했다.

나는 수가 적지만 다른 곳에서 온 아이들 무리의 대장이 되었다. 그리고 텃세의 수호자 역할을 자처했다. 그 동네 살았다는 게 큰 유세거리라도 되는 양 행동하는 꼴들이 아니꼬웠다. 그래서 뒤집어버리고 싶었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되었을 때 학생회장 선거를 했다. 나는 몇 안 되는 친구들을 모아 회장선거에 출마했다.
눈에 안 띄는 일진짓거리는 쉽고 편해도 남들 앞에 공개적으로 나서서 일해야 하는 회장자리는 원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아마 귀찮았을 것이다. 자기들이 이미 다 잡아 놓은 터에 공식적인 권력이 뭐 더 필요했겠나?
회장선거 출마자는 별로 없었고 이점은 나에게 호재로 작용했다. 인지도도 별로 없던 군소후보가 일약 2위 후보로 발돋움한 것이다.

선거구도가 만든 허황된 지지였지만, 선거는 사람을 미치게 했다. 내가 뭐라도 된 것처럼 들떴다. 키 큰 친구 목마를 타고 왕처럼 유세를 하고 다녔다. 정말 회장 당선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현실은 현실이었다. 선거 결과 그 동네 출신이 회장이 되었고, 그 회장은 내가 제일 꼴 보기 싫어했던 덩치 큰 놈을 선도부장으로 임명했다. 텃세는 결국 권력이 되었다.
나는 3등을 해서 부회장이 되었다. 나름 학생회 집행부가 된 것이다. 그렇게 소위 ‘아싸’에서 ‘인싸’가 된 나는 한 줌도 안 되는 권력을 마음대로 누렸다. 야간 자율학습시간에 학생회 회의라는 명목으로 공식적 땡땡이를 칠 수 있었고, 그렇게 꼴 보기 싫어했던 텃세 주동자들과 친구를 먹었다. 선거는 사람을 미치게 했고 권력은 사람을 부패하게 했다. 이것이 나의 후회요 실패의 흔적이다.
소설가 다자이 오사무는 인간실격에서 이런 문장을 썼다.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
내 고등학교 때의 삶을 표현한 것과 다르지 않다. 이런 후회가 있는 삶인데 왜 나는 ‘운 좋은 놈, 인생은 감사할 것 투성이’와 같은 인생 찬가만 부르짖고 다녔는가? 그건 아마도 후회스럽고, 부끄러운 경험은 내 삶의 일부가 아니라고 배척했던 건 아니었을까?
마치 ‘후회와 실패’는 ‘행복과 감사’라는 동네 주민이 될 수 없다고 텃세를 부린 것은 아닐까!
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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